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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신화와 국가의 현실

유영수 (Tempried) · 2026. 6. 19.

두 민족의 적대는 흔히 "고대로부터의 숙명"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오늘의 적대는 오래된 형제의 저주가 아니라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만들어진 정치적 구성물에 가깝다.

초록

본 논고는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적대를 세 층위에서 검토한다. 첫째, 흔히 거론되는 "야곱과 이스마엘 자손의 갈등"이라는 신화적 서사가 실제 계보와 얼마나 어긋나는지 살핀다. 둘째, 고대 페르시아와 유대 공동체가 오히려 우호적 관계였음을 성서적 기억을 통해 확인한다. 셋째, 20세기 중반의 사실상의 동맹이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분기점으로 어떻게 급격히 적대로 역전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본 논고는 현재의 적대가 종교적 숙명이 아니라 근대 국가의 이념과 지정학이 빚어낸 구성물임을 주장한다.

I. 들어가며 — "오래된 증오"라는 착시

이스라엘과 이란의 대립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종종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에서 갈라진 형제의 반목이 오늘까지 이어진다는 식이다. 이러한 서사는 직관적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복잡한 현대 정치를 신화의 언어로 단순화하면서, 동시에 갈등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 화해의 상상력을 차단한다.

이 글은 그 익숙한 서사를 해체하는 데서 출발한다. 먼저 계보의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다음으로 실제 역사가 그 서사와 얼마나 다르게 흘러왔는지를 추적한다.

II. 두 계보의 혼동 — 이스마엘(아랍)과 페르시아(이란)는 다르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이란인은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대 전통과 이슬람 전통 모두에서 이스마엘은 통상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란인의 다수를 이루는 페르시아인은 셈족 계열의 아랍이 아니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리안 계통의 민족이다. 언어(페르시아어), 문화, 자기 정체성 모두에서 이란은 아랍 세계와 스스로를 구별해 왔다.

따라서 "야곱(이스라엘)과 이스마엘(아랍) 자손의 갈등"이라는 틀을 이란에 그대로 덧씌우는 것은 범주의 혼동이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갈등(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한)과,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갈등은 기원도 성격도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영토와 민족 자결의 문제와 깊이 얽혀 있다면, 후자는 오히려 20세기 후반의 이념과 지역 패권 경쟁에서 본격화되었다.

III. 성서적 기억 속의 페르시아 — 적이 아니라 해방자

흥미롭게도 고대의 기억 속에서 페르시아는 유대 민족에게 적이 아니라 해방자로 등장한다. 바빌론 포로기를 끝낸 인물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키루스 2세)였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고, 이 사건은 유대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고레스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피정복민의 종교와 관습을 존중한 통치자로 기억된다. 유대 전통은 그를 이례적으로 우호적인 이방 군주로 그린다.

에스더 이야기의 무대 또한 페르시아 제국이다. 위기와 구원이 교차하는 이 서사에서도, 갈등의 축은 "페르시아 대 유대"가 아니라 제국 내부의 음모와 그 극복이었다. 요컨대 고대의 기억에서 페르시아는 이스라엘의 숙적이 아니었다. 오늘의 적대를 "태곳적부터의 증오"로 설명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IV. 근대의 밀월 — 팔레비 왕조와 '주변부 동맹' (1948–1979)

더욱 결정적인 사실은, 불과 두 세대 전만 해도 이스라엘과 이란이 사실상의 동맹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비 왕조 치하의 이란은 이스라엘을 사실상 인정하고 긴밀히 협력했다.

그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이른바 "주변부 동맹(periphery doctrine)" 전략이 있었다.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의 바깥 고리에 있는 비(非)아랍 국가들 — 이란, 튀르키예, 에티오피아 등 — 과 손잡아 포위를 돌파하려 했다. 페르시아라는 정체성으로 아랍과 거리를 두던 이란은 이 구상에 들어맞는 상대였다.

협력은 구체적이었다. 석유 공급, 정보기관 사이의 교류, 군사·기술 협력이 이루어졌다. 두 나라는 공히 소련의 남하와 급진 아랍 민족주의를 경계했고, 이 공동의 위협 인식이 둘을 묶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오늘의 적대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근의 역전"이다.

V. 단절의 순간 — 1979년 혁명과 이념의 역전

전환점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었다.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고 들어선 새로운 체제는, 이전 정권의 친(親)서방·친이스라엘 노선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시온주의에 대한 적대와 팔레스타인 연대가 새 체제의 핵심 이념이 되었고, 이스라엘과의 모든 공식 관계는 단절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 단절을 추동한 것이 고대의 종족적 원한이 아니라 혁명이 내세운 새로운 정치 신학이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자기 정의(self-definition)가 바뀌자, 같은 지정학적 좌표 위에 있던 두 나라의 관계가 동맹에서 적대로 뒤집혔다. 이것은 "형제의 저주"가 아니라 이념의 선택이 만든 결과였다.

VI. 적대의 구조화 — 핵, 대리전, 종말론적 수사

1979년 이후의 적대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구조화되었다. 핵 개발을 둘러싼 긴장, 역내 여러 세력을 통한 대리전 양상, 그리고 양측 모두에서 동원되는 종말론적·실존적 수사가 그것이다. 각자는 상대를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실존적 적으로 규정하게 되었고, 이 규정 자체가 적대를 자기실현적으로 강화했다.

여기서 신화적 서사는 사후적으로 소환된다. 즉 적대가 먼저 생기고, 그 적대를 "태곳적부터의 숙명"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형제 갈등의 언어가 끌어들여진다. 신화가 갈등을 낳은 것이 아니라, 갈등이 신화를 필요로 한 것이다.

VII. 나가며 — 신화는 운명이 아니다

본 논고가 보여주려 한 것은 단순하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적대는 고대로부터 예정된 형제의 저주가 아니라, 근대 국가의 이념과 지정학이 빚어낸, 비교적 최근의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계보를 따지면 두 민족은 흔히 말하는 그 "형제"조차 아니며, 역사를 따지면 둘은 오히려 우호와 협력의 긴 시기를 공유했다.

이 사실은 작지만 중요한 희망의 근거가 된다. 만들어진 적대는, 원리상 다시 풀릴 수 있다. 갈등을 "숙명"으로 봉인하는 신화의 언어를 걷어내고 그 역사적 우연성을 직시할 때, 비로소 화해의 상상력이 열린다. 인류세의 시대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회복을 묻는 일은, 바로 이 봉인된 신화를 다시 여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더 읽어보기를 위한 길잡이

  • 고대 근동사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과 고레스 칙령에 관한 일반 개설서
  • 구약 역사서 — 에스라·느헤미야의 귀환 서사, 에스더기의 배경
  • 현대 중동 정치사 — 이스라엘 '주변부 동맹' 전략과 팔레비 시대 이란·이스라엘 관계
  • 1979년 이란 혁명과 그 이념적 전환에 관한 연구

※ 본 글은 KPGM 인문학 자료실의 샘플 논고로, 공개된 일반 역사·종교 지식을 정리한 학술 참고용 분석입니다. 특정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으며, 세부 사실은 일차 사료와 전문 연구로 교차 확인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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