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강해

제목: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

서기수 (Reston) · 2026. 6. 28.

본문 : 사도행전 2:42-47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서론 : 하나님께서는 어떤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시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교회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시마다 수많은 교회가 세워져 있고,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하여 언제든지 예배를 드릴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건물은 점점 크고 아름다워지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사역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회는 많아졌지만 교회다운 교회는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 안타까운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의 규모를 이야기하고, 재정을 이야기하고,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번도 교회의 본질을 건물이나 숫자로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는 ἐκκλησία(에클레시아)입니다.

단어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 18에서 베드로에게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우리니"라는 말씀은 교회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만드는 조직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 42절부터 47절은 바로 질문에 대한 가장 분명한 성경적 대답입니다.

사도행전은 단순한 교회사(敎會史) 아닙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성령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셨는지를 보여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The Ac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공동체를 세우시며, 복음을 확장하시는 역사가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직후에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 1절부터 13절에서는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14절부터 36절에서는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37절에서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회개하며 반응하였고, 41절에서는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단지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곧바로 42절부터 47절까지를 기록하면서 성령께서 세우신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미화한 기록이 아닙니다.

또한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역사 기록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어떤 공동체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청사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의 교회에게 보여 주시는 영원한 교회의 모델이라고 있습니다.

누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교회의 가지 기둥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사도의 가르침(διδαχή, 디다케), 교제(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 떡을 떼는 (κλάσις τοῦ ἄρτου, 클라시스 아르투), 그리고 **기도(προσευχαῖς, 프로슈카이스)**입니다.

가지는 단순한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초대교회는 건물도 없었고, 제도도 완성되지 않았으며, 조직도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이 계셨고, 말씀이 있었으며, 사랑의 교제가 있었고, 예배와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위기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고,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난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전에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고, 인간의 전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된 사람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 앞에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인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 가는 교회인가?"

질문은 교회 전체를 향한 질문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2 42절부터 47절을 통하여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가지 특징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세워지는 교회, 사랑으로 하나 되는 교회, 예배와 성찬 가운데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성장시키시는 교회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이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다시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1.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2:42a)

본문 42절은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2:42)

누가는 교회의 번째 특징으로 예배나 기적이 아니라 말씀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언제나 말씀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τῇ διδαχῇ τῶν ἀποστόλων( 디다케 아포스톨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διδαχή(디다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강의나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어는 διδάσκω(디다스코), "가르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복음을 권위 있게 전수하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의 중심에는 사람의 생각이나 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명령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게 하라"거나 " 조직을 만들라"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먼저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을 이어받은 제자훈련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특별한 체험이나 은사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마다 언제나 말씀이 함께 선포되었습니다.

오순절에도 베드로는 방언만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떠나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바울도 디모데후서 3 16-1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은 헬라어 θεόπνευστος(테오프뉴스토스)입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종교 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담긴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하여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말씀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히브리서 4:1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말에는 감동을 받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신명기 8 3절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 (마태복음 4:4)

육신은 음식이 없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말씀이 없으면 반드시 메말라 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위기는 프로그램의 부족이 아니라 말씀의 기근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미 시대를 예언했습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8:11)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며, 성도는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사라지면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게 되고, 말씀이 살아나면 교회는 다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됩니다.

누가는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힘썼다"라고 번역하지만, 원문은 προσκαρτεροῦντες(프로스카르테룬테스) 입니다.

단어는 πρός(프로스, "향하여") καρτερέω(카르테레오, "굳게 견디다, 인내하다") 결합된 합성어입니다.

문법적으로는 현재 능동 분사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변함없이", "습관적으로 전념하였다"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초대교회 성도들은 일시적인 열심을 것이 아니라 평생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취미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모습은 시편 기자의 고백과도 연결됩니다.

"주의 말씀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또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입에 꿀보다 다니이다." (시편 119:103)

말씀은 길을 비추는 빛이며, 영혼을 살리는 양식이며,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 입니다.

종교개혁자 John Calvin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조직이나 제도에서 찾지 않고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없는 교회는 인간의 모임일 뿐이지만,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세상의 소리에 기울이며 살아갑니까?

스마트폰의 뉴스와 영상은 수없이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읽지 못한 하루를 마감하지는 않습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는 언제나 말씀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과 결코 분리될 없습니다.

에베소서 5 18절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하고, 이어지는 골로새서 3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말씀합니다.

본문은 구조와 결과가 거의 동일합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삶과 말씀 충만한 삶이 서로 분리된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의 번째 표지는 화려한 건물도, 뛰어난 프로그램도, 많은 재정도 아닙니다.

말씀 앞에 겸손히 앉아 배우고,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공동체 바로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본론 2.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는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2:42b, 44-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는 사도의 가르침을 설명한 곧바로 번째 교회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서로 교제하고…" (사도행전 2:42)

짧은 문장 속에는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단순히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본문에서 "교제"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입니다.

단어는 κοινός(코이노스)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하였는데, "공동의", "함께 소유한", "공유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κοινωνία 단순히 친교(Fellowship)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믿음과 사명을 함께 나누는 영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제를 함께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 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여기서 코이노니아의 번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며, 연합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동체성은 인간적인 친밀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시작됩니다.

또한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1 3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참된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이 사람과 진정한 교제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비로소 형제와도 화목할 있습니다.

누가는 이어서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믿는 사람이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사도행전 2:44)

여기에서 " 함께"라는 표현은 헬라어 ἐπὶ τὸ αὐτό(에피 아우토)입니다.

표현을 직역하면 "같은 곳을 향하여", "같은 목적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같은 장소에 모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믿음과 같은 비전, 같은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와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제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교회는 획일적인 조직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영성의 문제입니다.

누가는 계속해서 놀라운 사실을 기록합니다.

"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며." (사도행전 2:45)

구절은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공산주의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사유재산을 부정하거나 강제적인 재산 공유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나누어 주며"라는 동사는 헬라어 διεμέριζον(디에메리존)으로, 미완료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재산을 나눈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필요가 생길 때마다 자발적으로 계속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산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소유욕을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 "이라고 붙잡았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의 "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만드시는 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 2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여기에서 ""이라는 말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만이 아니라, 삶의 무게와 고통까지 포함합니다.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는 서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서로의 눈물을 함께 흘리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로마서 12 15 이렇게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품어 주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며 고린도전서 12 26에서 말합니다.

"만일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몸의 부분이 아프면 온몸이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서로 연결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Dietrich Bonhoeffer Life Together』에서 매우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의 곁에 두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종종 완벽한 교회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교회를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랑보다 경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전도 방법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 알리라." (요한복음 13:35)

주님께서는 "너희가 교회를 세우면",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훌륭한 건물을 지으면" 사람들이 제자인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 제자의 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얼마나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있습니까? 우리는 같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만 서로의 이름도 모른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함께 찬양하지만 서로의 눈물을 보지 못하고, 함께 기도하지만 서로의 짐을 나누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혼자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의 번째 표지는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의 삶을 책임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본론 3.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는 예배와 선교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2:46-4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번째 특징이 말씀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이며, 번째 특징이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누가는 마지막으로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본문 4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46)

가장 먼저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날마다"입니다.

표현은 헬라어 καθ᾽ ἡμέραν(카트 헤메란)입니다.

표현은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가 아닙니다.

누가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초대교회의 신앙이 특정한 절기나 안식일에만 머무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매일의 속에서 지속되는 신앙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주일 시간의 예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배는 일주일에 드리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삶의 방식(Lifestyle)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 1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 예배" 헬라어 λογικὴ λατρεία(로기케 라트레이아, logikē latreia)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당에서 드리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러한 삶의 예배를 실천하였습니다.

누가는 이어서 그들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기록합니다.

여기서 "힘썼다" 표현 역시 앞에서 살펴본 προσκαρτεροῦντες(프로스카르테룬테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의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예배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흥미롭게도 "성전" 기록하지 않습니다.

곧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여기서 "떡을 떼다" 표현은 헬라어 κλάσις τοῦ ἄρτου(클라시스 아르투)입니다.

κλάσις(클라시스) "떼다", "나누다"라는 뜻이며, ἄρτος(아르토스) "" 또는 ""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표현은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성찬(The Lord's Supper) 가리키는 신학적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2 19에서 떡을 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초대교회는 단순히 함께 식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식탁에서도 십자가를 기억했습니다. 그들에게 성찬은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속에서 기억하는 예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을 달에 혹은 분기에 드리는 예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식탁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가정은 하나의 작은 성전이었으며, 식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배였습니다.

누가는 이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기서 "순전한 마음" 헬라어 ἀφελότητι καρδίας(아펠로테티 카르디아스)입니다.

ἀφελότης(아펠로테스) "순수함", "거짓이 없음", "꾸밈없는 진실함"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의 기쁨은 외적인 환경에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박해를 경험하게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 22에서 성령의 열매를 설명하며 가장 먼저 사랑 다음에 "희락"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성령이 계신 곳에는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47절에서 누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여기서 "칭송"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χάρις(카리스)입니다.

보통 단어는 "은혜" 번역되지만, 본문에서는 "호의", "좋은 평판", "존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지만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구별되었지만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타협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 1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박수를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은 교회의 선한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교회 성장의 비밀을 문장으로 기록합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7)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는 "주께서"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ὁ δὲ κύριος( 퀴리오스) 시작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베드로도 아니고 사도들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더하게 하시니라" 동사는 προσετίθει(프로세티데이)입니다.

동사는 미완료시제(Imperfect Tense)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 더하셨다"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계속해서, 날마다, 지속적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교회에 더하여 가셨다 의미입니다.

이것은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성장을 위해 수많은 방법과 전략을 연구합니다.

물론 건강한 시스템과 리더십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교회의 성장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3 6-7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우리는 씨를 뿌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르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은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하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세우시는 교회의 마지막 표지는 예배가 삶이 되고, 성찬이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며,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모든 사역의 열매를 하나님께 맡기는 선교적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깊은 예배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거룩한 삶입니다.

뛰어난 전략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실 있도록 말씀과 기도와 사랑 안에 거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할 예배는 감동이 되고, 성찬은 은혜가 되며, 삶은 선교가 되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이며,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기대하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결론 :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로 돌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 2 42절부터 47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누가는 짧은 여섯 속에서 초대교회의 외형적인 성장보다 중요한 교회의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먼저 말씀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τῇ διδαχῇ τῶν ἀποστόλων( 디다케 아포스톨론), 사도들의 가르침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철학이나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능력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둘째로,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 이루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경쟁자가 아니라 형제로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움켜쥐기보다 나누었고, 혼자 신앙생활하지 않고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갔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건물을 보고 감동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셋째로,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예배와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κλάσις τοῦ ἄρτου(클라시스 아르투) 통하여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였고, καθ᾽ ἡμέραν(카트 헤메란)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의 속에서 χάρις(카리스), 하나님의 은혜와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7)

여기에서 누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교회의 성장을 이루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ὁ δὲ κύριος( 퀴리오스), 주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감소를 걱정하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뛰어난 전략을 연구하며, 효과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께서 일하실 있는 교회인가?"

초대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특별한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권력도 없었고, 경제적인 부도 없었으며, 정치적인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끊임없는 박해와 핍박 속에 살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를 지나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유는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하셨고, 성령께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성령께서 예배를 생명력 있게 하셨고, 성령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도 원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재정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건물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오직 성령께서 함께하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붙들었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찬과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과 교회를 다스리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교회만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사람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며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드리고 있는가?

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교회의 성장을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있는가?

만일 질문 앞에서 부족함을 느낀다면 오늘이 바로 다시 시작할 은혜의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에스겔 37:9)

성령의 바람이 불자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은 있는데 생명이 없고, 예배는 있는데 감격이 없으며,

봉사는 있는데 기쁨이 없고, 교회는 있는데 공동체성이 사라졌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성령의 바람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바로 성령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도 임하신다면, 우리의 심령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다시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사도행전을 "끝나지 않은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성령께서는 여전히 복음을 확장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도행전 29장을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시대의 교회가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를 통하여,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통하여, 예배와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께서 세우시는 교회가 됩시다.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가정이 됩시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하여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거룩한 공동체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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